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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진호창민] 약속

화창하리만큼 그와 걸맞게 찌는 날씨에 차에 탄 창민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순찰차는 간밤에 아무도 탄적이 없었는지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라 무슨 짓을 해도 더운 공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호는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서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창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경위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순경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네? 뭐 말씀이세요?"
"에어컨."


진호는 창민의 말에 그제야 에어컨을 틀었다. 벌써 반년도 넘게 순찰을 같이 돌았지만 창민이 생각하기에 진호는 그리 경찰에 소질이 없어보였다. 저 순둥한, 밝게 웃으면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좋게 만드는 얼굴이 어디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여자들 여럿 흔들것 같았다. 현실은 덩치큰 삼촌뻘인 남자와 단둘이 순찰을 도는게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첫 근무날을 창민은 잊을수가 없었다. 겉모습은 정말이지 순진해 빠져보이는 놈이 경찰을? 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고왔다. 하지만 의외로 서슴없었다. 로봇처럼 일만해대는 박창민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은 진호가 최초였다.
묵묵히 운전만 하던 진호가 대뜸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보였다. 창민은 창에 턱을 괜채 밖만 내다볼 뿐이었다."경위님. 이거 드세요. 아까 드린다는게 깜빡하고-."창민은 그제야 진호를 바라보았고 말없이 커피를 받아들였다. 눈으로만 보아도 차가워보이는 커피는 냉동실에 두었는지  손이 시려울지경이었다."거, 앞 좀 잘 봐요. 나 쳐다보지 말고."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에 집중했다. 창민은 항상 진호가 운전대를 잡을때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운전 할 때에 주절주절 떠드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몇마디정도는 주고받고는 했는데 진호와 있을때면 유난히 조용했다. 진호의 운전이 불안한지 항상 그를 주시했고 그 모습은 마치 선생과 제자 같았다.
한참을 달리다 도로가 한켠에 잠시 정차를 했다.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송골송골 맺힌 땀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차 안은 조용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 즈음 진호는 창민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갑자기 뭔가 싶어 가만히 있는데 창민의 목에 진호의 손이 닿았다.


"여기 베이셨습니다. 피나서 카라에 묻었어요. 옷 갈아입으셔야겠어요."
"그래요? 몰랐네."


진호의 손이 닿았던 곳을 매만지던 창민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진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진호에게 창민은 스승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화 한번 내지않고 모르는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래도 모를때면 살짝 비꼬는 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다시한번 알려주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정도로 창민은 진호에게만큼은 다정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경을 조금 넘어선 상태였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창민은 진호가 준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퇴근을 할 때까지 둘은 일에 집중했다. 딱지를 떼고 밥을 먹고 실랑이를 벌이고 평소와 다름 없었다.
탈의실에 들어선 창민은 뒤따라 들어오는 진호를 무시한채 옷을 갈아입었다. 등에 세겨진 독수리문양의 문신이 오늘따라 눈에 띄었다. 뒤에서 조용히 옷을 갈아입던 진호는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물었다.


"오늘도 어디 가세요?"
"어. 내가 참 바빠요."
"힘드시겠어요. 저는 이 일만으로도 벅찬데.."
"이순경이 나 정도 되면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아닐수도 있고."


창민은 말을 흘기며 눌린 머리를 거울을 보며 정리했다. 둘은 항상 같이 있는것 치고 그리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반년즈음 되면 미소가 공존할때도 됐건만 창민의 차가움 때문인지 진호마저 미소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진호는 항상 밝은 청년이었다. 정말이지 창민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았다.


"저.. 경위님."
"말해요."
"언제 저녁 괜찮으세요?"


락커문을 닫은 창민은 부스스한 진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왜."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침을 꼴깍 삼킨 진호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진호가 귀엽기라도 한지 볼을 툭툭 가볍게 친 창민은 손에 들고있던 코트를 입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요. 뭐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힘든 일 있으면 털어놓고."
"ㄴ..네. 감사합니다."
"감사할건 아니지."


창민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 사라졌다. 진호는 한동안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용기내어 건넨 말에 거절당하지않아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집까지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며칠간 근무를 하는동안 창민은 별 말을 하지않았다. 진호와 약속했던 저녁에 대한 것도 일에 대한 것도, 그냥 말이 없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지라 진호는 끙끙 앓으면서도 묵묵히 운전만 할 뿐이었다. 근무가 겹치지 않는 날이면 진호는 미소를 잃었다. 창민이 당연하게도 우위였다. 그리고 두어달은 손살같이 지나갔다.


"이순경."


교대시간. 의자에 앉아있는 진호는 정신이 나가있었다. 땡볕에서 하도 딱지를 떼서인지 땀이 비오듯 쏟아져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진호는 한참이나 그랬다.


"이진호 순경. 내 말 안 들려요?"
"네..네? 아 박 경위님."


잔뜩 풀린 눈으로 창민을 바라본 진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나봐요. 정 경사가 이 순경 종일 기운 없다고 하던데."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창민은 갓 출근을 했는지 아직 사복차림이었는데 역시나 검은 셔츠를 입고있었다. 여느때와 같았다.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민의 앞에 섰다. 비뚤어진 경모를 고쳐쓰며 그를 응시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옷 갈아입을거면 같이 가요. 할 말 있으니까."
"네.."


이 순간이 싫었다. 답답하고 속이 녹아내릴것만 같았다. 식은땀은 속절없이 흘러내렸고 환자마냥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쳐있었지만 묵묵히 걸으며 창민의 뒤를 따랐다. 탈의실에 도착하고나서야 경모를 벗은 진호는 셔츠를 벗는 창민의 손을 잡았다.


"말 하세요."
"뭐가 그렇게 급하실까. ... 알았어요 그럼."


단추만 푸른 채 진호와 마주본 창민은 묵묵히 서 있었다. 진호는 일을 하는 내내 창민의 생각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하고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제지하면 뭐라고 하는 건 아닌지, 기분상하지않게 하려면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전부 다 생각했다. 사회초년생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지만 진호는 잠이 들때까지 고민했다.


"내일 내가 쉬는 날이고 일도 마무리 지어질 것 같으니까 이순경 퇴근 전에 올게 같이 저녁 먹어요."
"네. 알겠습니다. 저 혹시..."


기쁨도 잠시 진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창민을 바라보았다.


"한번만 안아주시면 안됩니까."
"수명 줄어들텐데."


창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했지만 진호는 진지했다. 저 자신보다 큰 덩치의 남자를 마음에 담아두었다. 아무도 알지못했지만, 심지어 교통과의 사람들도 전혀 눈치채지도 못할만큼 숨겨왔지만 창민의 앞에서는 모든게 무장해제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어린아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늘 너무 힘들어서 위로가 필요했나보네."


진호의 갈곳잃은 손을 내리고 가볍게 끌어안은 창민은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진호는 포근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물은 많이 마셨어요? 안색이 안 좋아. 쓰러지면 내 책임 같잖아."
"안 쓰러집니다."
"그래. 얼른 퇴근해요."


창민의 품에서 벗어난 진호는 눈을 꿈뻑이며 넥타이를 풀었다.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상의를 탈의한 창민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위님. 저 경위님 좋아합니다."
"나도 이 순경 좋아해요."


무미건조하게 말을 받아친 창민은 당연한걸 뭐하러 굳이 말로 하냐는 표정이었다. 종종 창민이 크고작은 일들을 수습하면 정 경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징그럽게 창민에게 좋아한다며 한정적인 애정표현을 하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창민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정 경사님이나 다른 분들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런거 말고, 진짜로 좋아합니다."
"나를 왜요."


그제야 옷을 다 입고서 뒤를 돌아본 창민은 눈에 힘을 주며 모자를 눌러썼다. 악의도 뭣도 없었지만 진호는 손을 떨었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예상했던 답인지 아니면 예상치도 못했던 답인지 창민은 미소를 지으며 진호의 머리를 다시한번 쓰다듬었다. 진호의 창민 바라기는 3개월 전에 시작되었다. 회식자리에서 자신을 챙겨주고 혹여나 이리저리 치이지는 않을까 옆에 있던 것이 어느새 진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4개월에 접어들었을 즈음 창민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있었다. 근무시간 외에는 무얼하는지 궁금하고 알고싶은 사람이었다. 창민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어. 잘 생각해봐요. 내 호의에 그런 생각이 든건 아닌지."
"호의때문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경위님 좋아합니다."
"생각할 시간 좀 줘요. 그정도는 줄 수 있잖아."
"어... 네. 바로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더이상은 창민을 바라보기 어려운지 뒤를 돈 채 옷을 갈아입었다. 콩깍지일수도 있겠지만 진호는 창민의 다정함에 그에게 스며들었다.


"내가 그런식으로 행동하면 이순경이 당황스러울 거 같아서. 내일까지 말 해줄게요. 퇴근해 얼른."
"네. 내일 뵙겠습니다!"


탈의실에 혼자 남은 진호는 어느새 반짝이는 눈으로 한참이나 창민의 락커를 쳐다보았다. 내일이 정말 기대됐다.


일찍이 출근한 진호는 여느때보다도 열심히였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했고 동료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어제까지만해도 세상을 뜰것처럼 정신을 놓더니 오늘은 또 팔팔해서 하지말라는 일도 도맡아 할것만 같았다.
6시. 퇴근시간이었다. 서로 들어온 진호는 내심 기대를하며 자리로 향했다. 창민은 그곳에 없었다. 혹시나 탈의실에 있는 건 아닐까싶어 그곳도 가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일단은 옷을 갈아입었다. 서 어딘가에는 있을테니. 일찍 출근한 야간근무조에게 창민에 대해 물었지만 다들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고 창민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진호는 서에서 창민을 기다렸다. 늦어도 퇴근 전까지 오겠다던 창민은 10시가 훌쩍 넘는 시간까지 오지 않았다. 진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주변에서 왜 퇴근을 안하냐는 말들도 들려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묵묵히 창민을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다. 오전 1시. 제법 한산해진 서에는 진호외에 두세명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진호는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세웠다.언제 잠이 들었는지 서는 소란스러웠다. 강력반이 바쁘게 움직였고 교통과와 다른 과들은 일제히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 볼 뿐이었다. 진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강력반의 최형사에게 다가갔다.


"최형사님 무슨 일 있는겁니까?"
"너 오늘 비번 아니야? 여기 왜 있어. 박 경위님 사건 모르는거 같다?"
"비번 아닙니다. 박 경위님이 왜요?"


최형사는 반장의 눈치를 보다가 진호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이제는 경위도 아니지. 박창민이 죽었어. 연루된 사건이 한두개가 아니더라고. 그래서 지금 책상도 비었잖아. 넌 뭐 아는거 없냐."
"바, 박경위님이 주..죽...죽었..."


진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최형사의 말을 듣고나서야 창민의 자리를 보았고 그곳은 이미 쑥대밭이었다. 정신이 아늑해지는 것 같았다. 이 말도안돼는 말을 믿으라고 뱉는건가 싶었고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다. 연루된 사건이 많았고 죽었다니.


"최..최형사님.. 담당..담당자 누구예요? 네?"
"어차피 이거 우리가 담당 못하잖아. 넘어간지 오래라고. 1팀이 출동했는데 옆관할에서 맡는댄다. 자세한건 서 형사한테 물어봐."


가볍게 목례를 한 진호는 분주해진 강력팀에 기웃거리며 서 형사를 찾았다. 다른 형사와 경찰들은 진호의 행동에 대체 저새끼가 뭐하는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강력반 입구에서 마주친 서형사는 진호를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서 형사님! 저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십쇼!"
"뭐."
"바..박경위님 무슨 일입니까."
"마약절취 및 밀매 불법 유흥업소 운영등 기타 여러가지 엄청 많더라."
"그럼 기사로 나오는 겁니까?"
"미쳤냐? 그러면 나라 난리나. 덮기로 했단다."


아직 듣지못한 말들이 많은데. 그렇게 가 버리는게 어딨습니까. 나한테 오기로 했잖아. 나 당신 정말로 많이 기다렸어요. 누구보다도.


"저 박경위님 사건파일 있으면 보여주시면 안됩니까?"
"니가 그걸 봐서 뭐하게. 어차피 우리가 수사 하지도 못해."
"보기만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 경위라고 하지마라. 주변 분위기 안 좋다. 복사본이긴한데 다 보면 내 자리에 올려놔. 너 임마. 순경 주제에 이런 거 궁금해하고 아주.. 어? 참나.."


서형사는 진호에게 사건파일을 내밀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진호는 집을 마다하고 사건파일을 가지고 휴게실로 향했다. 사건에 연류된 수많은 사람들중 서부경찰서 강력반 고건수 경사가 눈에 들어왔다. 뺑소니사건을 조사할때 만났던 형사였다. 진호는 고경사가 진술하고 겪은 일들과 파일의 글들을 몇번이고 읽고 읽었다. 한시간즈음 흘렀을까. 정적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일은 고스란히 서형사의 자리에 올려놓고 서를 나왔다.
박경위님. 저는 당신의 죽음에대해 모르는게 많지만, 당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이것만은 알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죽음에 가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놈이지만 박경위님만큼은 저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떠나버렸지만 해야할 건 해야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박경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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