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잊혀질까 판호는 내심 조바심을 냈다. 그러고 싶지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금새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시궁창이 내키지 않는 건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임에도 판호는 그런건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듯 피다만 담배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깊어만가는 왼쪽 뺨의 상처는 찢어질만큼 애렸다. 정말로 아파서가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지하로 들어오는 몇 안되는 빛은 판호의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퀘퀘한 냄새로 가득찬지 오래인 지하실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안식처였다. 받아들이고싶지않아도 그래야만하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곳이었다. 그 때 그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썩지않아도 되었을테지만 판호는 딱히 후회하는 기세도 없었다. 세개피를 연달아 피고나서야 철제 테이블에 담배를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컬이 들어간 머리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차에 올라탄 판호는 특유의 빈정상한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할 마음이 없었는지 옛노래를 흥얼대며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벌써 3년도 더 지나버린 일을 생각해서 어쩌란거냐는 식이기도 했고 미련없이 떠나기로 했기에 그랬다. 그게 맞는 거였고 지금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 때를 판호는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부산시내로 들어선 차는 머지않아 한 가게에 멈춰섰다. 가게는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한듯이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운영은 아직까지도 정상적으로 되고 있는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갔고 판호는 그 뒤를 따랐다. 여느 가게와 같았다. 커피와는 거리가 먼 판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지루한 벽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었다. 이곳은 판호의 옛 추억이라면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그게 정말로 제대로 된 추억이었다면 발을 디뎟을 즈음 어떠한 탄식이라도 뱉었겠지만 그러지않았기에 판호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채 삐딱하게 앉아있던 판호는 종업원이 커피를 내주자 눈인사를 했다.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졌다한들 예의를 갖추는 건 잊지않았다. 본인의 생각일뿐이겠지만 그랬다.
문득 보상심리가 떠올랐다. 한참을 쓰디쓴 커피를 홀짝이다, 주마등 스치듯 떠오른 네글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만큼 그리 좋은 단어는 아니었는지 커피잔을 작지않은 소리로 내려놓았다. 지난 과거의 일을 떠올릴때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니건만 굉장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에는 나름대로 잘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판호는 그때의 자신이 개차반에 멍청한 새끼라고 생각했다. 그건 비단 자신만의 생각은 아니었을거다. 한솥밥을 먹던 형배는 분명 그리 생각할게 뻔했다. 그때에는 깡패 짓거리가 대체 뭐라고 그렇게나 죽고 못 살았는지..
이 좁아터진 부산에는 미친놈이 정말 많았다. 판호도 거기에 속했고 형배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말하자면 판호와 형배의 보스가 살짝 미친지라 둘도 그 모습을 어디엔가는 빼다 박았기에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에는 참 좋았다. 화나는 일도 슬픈 일도 없었기에. 그러나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죽고 못살던 형배와 판호는 그때 갈라지게 되었다. 판호는 아직도 어쩌다 여기까지 온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비록 흉터를 남기긴 했어도 형배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 말할 수 있는 놈이었으니까. 적어도 판호에게 형배는 그랬다. 어느날 갑자기 형배는 다른 무리들과 어울렸다. 눈에 띌만큼 말이다. 그리고 사건은 불과 며칠만에 터지고야 말았다. 보스의 갑작스럽고도 의문스러운 부재에 형배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판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판호는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윽하면서도 날카로운 살기가득했던 눈빛을.
머리가 복잡해지기라도 했는지 얼굴을 문지르던 판호는 커피를 원샷하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커피보디는 술이라며 궁시렁대고는 차를 뒤로하고 걸었다. 비가 오려는지 꿉꿉한 날씨는 판호의 마음처럼 흐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즈음 판호의 귓가를 때리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 이미 알고있다는 듯이 뒤를 돈 판호는 불편한기색을 보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맞네 김판호."
5년도 채 지나지않은거에비해 형배는 몰라보게 달라져있었다. 고급진 수트와 신발을 신고 선글라스까지 끼고있어 한눈에봐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짢은 판호와 달리 형배는 넉살좋게 미소를 띄었다.
"안 반갑나."
"어."
"맞나."
"맞다."
"삐딱한건 여전하네."
"그래맨든거 니 아이가."
차갑게 대화가 오고가는 와중에 담배를 입에 문 판호는 형배의 알수없는 표정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다싶었는지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에 형배의 손이 판호의 얼굴에 닿았다.
"흉 짓네."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올리자 판호의 표정은 순간 굳고야말았다. 너무나도 뻔뻔했다. 판호에게는 그렇게밖에 느껴지지않았다.
"손 치아라."
"니 내 손 좋아했다이가."
"그 김판호 이제 없으니까 손 치우라고."
눈에 힘을 준 판호는 형배가 순순히 손을 내리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르자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연신 껌뻑임을 반복했다. 판호에게 형배는 더이상 돈독한 사이가 아닌지 오래였다. 형배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판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둘은 어렸을때부터 그럴듯한 공통분모도 없었다.
"지 가던길이나 가제 왜 부르고 지랄이고 지랄은."
기어이 속에서 맴돌았던 말을 꺼낸 판호는 형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망설임없는 판호의 눈빛에 형배는 눈썹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니 마이 컸네."
"그라믄 니만 클줄 알았나. 내도 머리가 있고 생각이 있는기라."
"맞나. 니 뭐하고 다니는데."
"알바아이다. 내 그만 간다."
"어데 가는데."
"니 없는데로 갈기다."
묵묵히 돌아선 판호를 형배는 말리지 않았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그 공간은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을만큼 무거웠다.
"아직도 내 밉나."
"모른다."
"안 미우면 그게 사람이가."
"듣기싫으니까 고마해라. 변명이든 해명이든 내 이제 니한테 미련읎다고."
"은제는 미련있든그처럼 말하네. 맞나."
어이가 없다는듯 입에서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 형배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형배의 입가에는 다시 미세하게나마 미소가 띄었다. 그걸 묵묵히 지켜 볼 리 없던 판호는 다시금 형배에게로 몸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것만같은 눈빛이었다.
"니 그래가믄 안되는기라 아나. 그래 니 혼자 잘났다고 그카믄 안되는기라고."
"안다 내도."
"그래가 좋았나. 연고도 없는데 가가 떵떵대며 사는게 좋았냐고. 이 씨발놈아."
태우던 담배를 바닥에 미련없이 버린 판호는 누가봐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더이상은 형배의 얼굴을 볼 수 없는지 고개까지 숙여 넓은 등만이 형배의 눈에 꽂혔다. 미안하다는 말을 바란게 아니었다. 적어도 한마디정도는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형배는 그 때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판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내가 어땠을거 같은데 니는."
"씨발 그걸 왜 내한테 묻는데요. 최사장님. 니가 알 거 아이가. 니 씨부리는거 들을라꼬 여 있는거 아이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요, 그 좆같은 쌍판떼기 보는거 싫다 이제. 그 말 할라고 그런기다. 아나."
"알았다. 가라 고마."
판호는 침을 삼켰다. 아직도 마음은 불안하기만했다. 모든게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형배를 뒤로하고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한 두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라고 니 어데가믄 방금처럼 남 앞에서 등 보이지마라."
판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이 격해져 더이상은 말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달라질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었고 판호는 이미 알고있었다는듯 묵묵히 차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아팠다. 정말이지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팠다. 가슴이 애리며 뻥 뚫린것처럼 그랬다. 시동을 거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음에도 판호는 기어이 운전을 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판호는 형배의 하극상에 관심이 없었다. 하극상이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고 누군가는 일으킬 일이었기에. 그게 형배였을때에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나몰라라 할 줄은 몰랐다. 10여년도 훌쩍 넘는 세월이 무색할만큼 형배는 판호를 단번에 등졌다. 이유같은 걸 물을 성격도 아닌지라 그 상황을 받아들였던 판호는 그렇게 형배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잊어갔다. 형배만 말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던 판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주변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지만 뭐가문제인지 쪽팔리기라도 한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방법이 없다. 폭포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판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가득 채워졌다. 동거동락했던 최형배를 잊지못해 쌈박질만 한 기억이 더 많은 이 시궁창, 팔자에도 없는 지하에 쳐박혀 여태 살아온게 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깟새끼가 뭐라고 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만 남긴 새끼가 대체 뭐라고.
형배는 창우의 만류에도 한참이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입에 문 담배는 이미 젖은지 오래였다.
"창우야. 니 김판호 아나."
"예."
"전마 내가 지 살린거 아는거같나 모르는거같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라믄 됐다."
말을 마치고나서야 대기해놓은 차에 탄 형배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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