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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재한해영] Untitled

오늘도 허탕을 쳤다. 이게 벌써 며칠째인지, 집에 들어간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건 범인이 아직도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들어온 해영은 언제나처럼 비워져있는 옆자리에 시선을 한번 두고 자리에 앉았다. 예전과 달라진점이 있다면 더이상 자신의 손에는 무전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항상 11시 23분만 되면 치직거리던 그 낡고 무거웠던 무전기는 해영의 책상대신 옆자리 주인의 책상에 올려져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가지고다니지않고 항상 책상에만 올려놓는지라 책상위의 부적이 되어버렸지만 재한은 그것을 항상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오직 해영과 재한만이 무전기에 대해 기억하고있었기에 그 의미는 굉장히 남달랐다.
새로운 미제사건의 파일을 훑어보는데 언제나처럼 요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재한은 남다른 애정표현으로 해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박해영. 넌 여기서 사냐? 나보다 늦게오는적이 없어."
"형사님이 너무 늦게오시는 겁니다. 브리핑하기 2분전에 오시는 그 버릇을 고친다면 저보다 빨리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말대답하네? 많이 컸다. 너 임마 어렸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하던 재한은 이내 하던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공장 인부점퍼같은 저 옷은 몇년동안 참 한결 같았다. 해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향했다. 애써 태연한 척 해야했다. 해영은 아직도 자신이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인주사건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재한의 탓도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이야기가 나오면 재한은 괜스레 해영에게 말을 아껴야했다. 서류를 보던 해영은 컴퓨터로 시선이 향해있는 재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영은 항상 재한에게 미안했다.

"형사님. 그때 이후로 그 껍데기집 가신적 없죠?"
"니 기억에는 그때 이후가 언젠데-."
"제가 초등학생일때요."
"너 혼자 고등학교때까지 잘 가더만 왜."


재한은 툴툴대며 마우스를 딸깍거리고는 턱을 괴었다. 둘은 그렇게 이상하게 대화를 끝내고 서로의 일에 집중했다. 그러자 느긋한 발소리를 내며 나타난 수현은 눈을 지그시 뜨고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재한의 맞은 편인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은 채 커피를 마셨다.


"둘이 오늘도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가보네. 또 어디 건드린 건 아니지?"
"야아-. 너는 내가 무슨 조폭인줄 아냐? 맨날 박해영 힘들게하는건 너잖아."
"선배님이 모르는게 하나 있는데 나 박해영 괴롭힌 적 한번도 없어요. 예전의 선배님이라면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내가 언제 너를 그렇게 괴롭혔냐? 다 챙겨주려고하는데 니가 칠칠맞아서 괴롭힌거같이 보인거지. 내가 언제 너 울린적 있어?"
"꼭 여자를 울려야만 나쁜새낀가. 상처주면 다 나쁜새끼지."


과거와 다른게 있다면 해영은 모르겠지만 재한과 수현의 관계였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지만 수현의 성격은 과거와는 몰라보게 달라져있었다. 재한에게 쐐기를 박는가하면 한 번도 져주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 자신에게 툴툴대며 잘해주던 재한을 따라하기라도 하듯이 그랬다. 그럴때마다 해영은 대체 자신이 어느타이밍에 끼어들어야할지 몰라 멍하니 둘을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하여튼간에-. 내가 전근갔던 그 몇년 사이에 아주 성격이 불같아졌어. 그 여리고 눈 똥그랗게 뜨면서 조신했던 차수현은 어딜간거야?"
"그런여자 이제 없어요. 선배님도 내 그런모습 싫어했잖아요? 언제까지 마스코트로 커피나 탈거냐면서. 다 과거일 뿐이지. 선배님의 뱃살처럼."
"야. 나 뱃살 없거든?"


이 유치하기 짝이없는 대화를 해영은 고문처럼 듣고있었다. 대체 일을 하려는건지 말싸움을 하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으니 괜찮은거겠지 싶다가도 전혀 괜찮지않은, 예기치않은 상황이 생기면 해영은 곯머리를 앓아야했다.


"박해영. 차수현 성격 언제부터 저랬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는 팀장님이랑 일한지 1년도 안지났습니다."
"내가 다른곳으로 발령나기전까지만해도 안 저랬거든. 대체 무슨 다사다난을 겪어서 저러냔 말이야. 여자들은 정말 갈대같다."
"형사님도 딱히 아닌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타이핑을 치며 무미건조하게 말을 하던 해영은 재한의 반응에 고개를 돌렸다. 재한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해영을 바라보았고 수현이 둘의 사이에 끼고나서야 그 상황은 종료되었다.


"두분다 그만하시고 사건에 집중합시다. 계철선배가 현장에 먼저 나가있으니까 우리도 출발해야지."
"뭐, 어떤 사건인데?"
"온몸이 매듭으로 묶여져서 버려졌던 시체 기억나요? 11년전에 3명의 여성을 죽인 혜원동 연쇄살인사건. 다시 나타났어요. 둘은 먼저 혜원3동 사건현장으로 가. 나는 어디 좀 들렀다가 갈게."
"어딜 들러? 운전해야지."
"형사님. 제가 못미덥습니까?"


재한의 말에 끼어든 해영은 본전도 찾지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옷을 챙겨나가는 수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한은, 해영은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뒤늦게 수현을 따라나갔다. 팀이란 뭘까.
서를 나와 수현을 따라가던 재한은 옷을 제대로 입은 후에야 숨을 돌렸다


."차수현! 너 혼자 어디가냐, 뭐 중요한거야?"
"국과수에 좀 들렀다 가려고요."
"거긴 왜."
"확인해야할게 있어서요."
"알았다. 나랑 박해영은 목격자가 있는지 알아볼게."


의문점이 많음에도 재한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어제오늘 수현의 까칠함은 극에 달했지만 재한은 해영에게도 수현에게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팀이기 때문에 그랬다. 재한은 믿었다.
수현을 보내고 밖에서 담배를 피던 재한은 해영이 차로 향하자 그를 멈춰세웠다.


"너 그.. 잠깐만 일로 와봐."
"네?"
"담배냄새 배도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긴 해영은 담배연기를 뿜는 재한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재한은 해영의 답을 듣고나서야 담배를 입에 문 채 해영의 옷깃을 바로잡아주었다. 재한의 행동에 잠시 멍했던 해영은 재한이 다시 그를 부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해? 타."
"네."


운전석에 앉은 해영은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고 재한은 담배를 다 태우고나서야 차에 탔다.


"미안하다. 차에 냄새 배게해서."
"아닙니다. 환기시키면 없어지는데요 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몰라도 재한에게 해영은 몇달전까지만해도 어려운 존재였다. 몇년간 무전기로 '박해영 경위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기에 막상 만났을 때에 어찌해야할지 알지못했다. 몇달간 이름도 부르지않은 채 옆에 빼꼼 나타나서는 할말만 하고 사라지는가하면, 같이 있으면 어색함이 느껴져 둘만 있는 것을 피했다. 해영에 대한 재한의 배려였는지 본인의 불편함에 대한 대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인해 해영이 먼저 재한에게 다가가 둘의 사이가 원만해졌다. 해영이 먼저 '이재한 형사님'하고불러서 재한이 '박해영 경위님'하고 부르자 해영은 말을 편히해도 된다며 웃어보였다. 이제는 이재한은 형사가 아닌 직급이었지만 박해영은 그를 계속 형사라고 불렀다. 재한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 너도 알지?"
"형사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더 같이 지내다보면 알게되겠지. 나는 남한테 어필하는 재주같은 거 없거든."
"형사님은 알면 알수록 좋으신 분이에요. 제가 이미 그걸 알잖아요."
"칭찬도 적당히해야 칭찬이지."


오늘따라 신호에 죄다 걸려 15분도 걸리지않는 혜원동에 가는 길이 순탄치않았다. 해영은 재한과의 대화가 더이상 어색하다고 생각하지않았다. 여느 다른사람들과 다를바없이 평범한 대화였다. 재한도 이제는 어색했던 때를 잊었는지 해영을 수현대하듯 했다. 되려 어려워진건 재한과 수현의 사이였다. 좀처럼 좁혀지지않았다.
빨간불에 걸려 신호를 기다리는중에 해영은 재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핸들과 기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재한 쪽으로 손을 뻗으니 재한은 해영의 가까워지는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뭐.. 뭐하는거냐."
"벨트요. 안매셨잖아요."


해영은 재한에게 친절히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러다 사고나면 형사님 손해입니다."
"야. 넌... 나한테 그냥 매라고하면되지 남자새끼가 아저씨한테 벨트를 매주고 싶냐?"
"형사님은 저한테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저씨가 아닌 형사님입니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아요?"


신호가 바뀌자 엑셀을 밟은 해영은 재한과 달리 미소를 머금었다. 재한은 혜원동에 도착할때까지 해영과 더이상 말을 섞지않았다. 창밖만 바라보며 턱을 괜채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있었다.
사건현장에 도착하자 동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그러지않은게 이상하지만서도 유난히 정신없기까지했다. 마트와 옷가게 사이에 좁게 나있는 골목에서 40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약 12시간 전, 밤 10시에 사건이 일어났다.
재한은 해영과 사건현장과 몇미터 떨어져있는 인도를 걸으며 현장으로 들어섰다.


"헌기 와있냐."
"네. 차형사님도 와계실겁니다."
"그래? 빨리도 왔네-."


재한은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않는 좁은 골목길. 골목은 다른 곳들처럼 가게하나없어 보잘것없고 허름했다. 폴리스라인을 들고 아래로 넘어온 재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째선지 뒤를 잘만 따라오던 해영이 느긋한 걸음으로 마실을 나온듯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질급한 티라도 내려는지 재한은 해영을 불렀다.


"박해영! 빨리 안오냐."


폴리스라인을 계속 들고있던 재한은 고개를 까딱히며 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해영은 가벼운 뜀박질을하며 폴리스라인을 넘어왔다.


"내가 이런거까지 해주는데 넌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냐. 이 답답아."
"네? 그게 무슨.."
"챙겨주려고하는데 그럴때마다 니가 딴짓하잖아. 임마."


오늘 해영은 멍할 일이 많았다. 재한의 호의가 익숙치않은 모양이었다. 대화가 원활해진건 그렇다치고 재한의 행동은 누구라도 익숙해지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건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한척 툴툴대면서 누구보다도 잘 챙겨주었기에 재한을 처음 보았을 때에 해영은 당황한적도 있었다.


"아, 차도와 인도 주변을 둘러보느라 그랬습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니 저녁만되어도 거리는 한산했을겁니다. 마트와 옷가게도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리는 곳이 아니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을거에요."
"마트말고 이쪽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잖아. "


재한은 반대편 골목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들은 차도 주변과 별반 다를 건 없었지만 눈에 띄는게 있다면 편의점이었다. 유동인구라고는 전혀 없을 것만같은 긴 골목에서 유일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곳이었다. 다른 가게들은 저녁에 여는 술집들 뿐이었다.


"마트에서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버스정류장인데 카드 충전 때문에 이 편의점에 많이들 왔을수도 있어."
"근방에 다른 편의점은 마트의 건너편 뿐이에요. 저녁시간에 이 골목에 유동인구가 많을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을 찾기가 쉽지는 않겠어요."
"주변에 CCTV도 없어. 그시간에 맛탱이 간 사람들이 반이상이었겠지."


재한은 해영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낮이라 한산한 동네는 범죄가 일어나도 이상하지않을만큼 조용했다. 해영이 알바생에게 질문을 하는동안 재한은 음료코너로 가 이온음료 두개를 꺼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날씨는 인상을 찌푸리게하기에 충분했다. 재한은 여름을 싫어했다. 형사생활에서 제일 몰골과 정신이 바닥나는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저녁시간대에 알바하시던 분 연락처와 집주소 좀 알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저기요! 저기.. 이거 먼저 계산 좀 해주고 찾아줘요."


알바생과 해영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재한은 음료를 흔들어보이며 계산을 요구했다. 재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해영은 그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알바생은 계산을 마치고 연락처를 찾으러 자리를 비웠고 그제야 재한은 캔을 따 음료를 마셨다.


"이거 마셔라. 하-. 더워서 살 수가 있나.. 거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재한 형사님.. 더우면 옷을 벗으세요."
"뭐? 옷?"


자신의 옷을 바라보던 재한은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뱉으며 겉에 입고있던 얇은 점퍼를 벗었다. 맨살이 드러난 재한은 그제야 살것같다며 다시 음료를 들이켰다.


"대단하지않냐?"
"뭐가요?"
"내가 이렇게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모를만큼 열심히 일을 하고있는거 아니냐."


해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가늠이 가질않았다. 다행히도 적절한 타이밍에 알바생이 돌아왔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형사님 가시죠."
"어.. 어."


편의점을 나온 해영은 주소지가 적힌 종이를 보며 재한을 응시했다. 그러자 재한은 얘가 왜 이러나싶어 두어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할말있어?"
"걸어서 10분정도 걸릴 것 같은데 형사님도 같이 가실건가해서요."
"그럼 같이가야지. 현장에도 두명 있잖아. 왜, 혼자가고싶어?"
"아닙니다. 가시죠."


재한은 해영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다. 굳이 물어야하나싶은 질문이었고, 그 질문은 재한이 해영에대해 의문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안 내키면 예전처럼 차수현이랑 같이 할래?"
"그런 뜻으로 말 한거 아닙니다. 덥다고 하셔서 걸으면 열이 나니까 가셔도 괜찮으실지 그걸 물은겁니다."
"야이씨... 내가 무슨 늙은이냐? 뭐 그런걸 물어? 묻기는.."


신호등 앞에 서서 음료를 홀짝인 해영은 신호가 바뀔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재한은 이런 침묵이 익숙하지도않고 성미에도 맞지않아 답답했지만 굳이 침묵을 깨면서까지 해영에게 할 말은 없었다.
주소가 적힌 집까지가는 내내 둘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마치 꺼림직한 일이라도 있는양 그랬다. 주소에 적힌 집은 빌라였고 해영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서울지방경찰청에 이재한 형사입니다. 어제 저녁에 편의점에 근무하셨죠?"


청아한 목소리의 여성은 문을 열고 재한과 해영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시죠?"
"어제 편의점 주변에 수상한 사람 없었나요?"
"술집 앞에서 30분가량 난동이 있었지만 그거 말고는 없었어요."
"혼자인 사람중에는 없었나요?"
"네."


소득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재한은 뭐가 불만인지 인상을 잔뜩 쓰고는 먼저 빌라의 계단을 내려갔다."혹시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해영은 먼저 내려간 재한을 따라갔다. 왠지모르게 삐뚤어진 재한을 해영은 알아차렸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재한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했던 해영은 어색했던 과거에도 재한의 기분만큼은 쉽게 알아차릴수 있었다.


"형사님. 이재한 형사님!"
"왜."
"무슨 일 있으신겁니까?"
"그런거 없어. 가자."
"갑자기 왜 먼저 가신겁니까?"
"넌 그런거 캐물으면 입 안아프냐? 그냥 좀 가자."


재한은 해영을 두고 빠르게 걸어갔다. 재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를만큼 어디로 튈지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지금과는 별로 다를게 없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달랐다. 해영은 재한의 뒤를 따라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해영은 사건현장으로 돌아가는동안 재한의 행동을 떠올렸다. 뭔가가 마음에 안드는것처럼 삐딱한게 불만이 있거나 할말이 있는거라 생각한 해영은 이내 결론을 내고는 재한에게 황급히 뛰어갔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해영의 발소리에 뒤를 돈 재한은 해영이 아닌 왼편을 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차가 빠른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박해영!"


그리 빠르지도 않은 다리와 불쾌한 날씨에 뛰려니 내키지 않았지만 재한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재한의 외침에 해영은 급히 멈추려했지만 평지가 아닌 조금 경사진 길이라 마음대로 되지않았다. 재한은 해영을 와락 끌어안고 아스팔트를 굴렀다. 간발의 차로 차를 피한 재한은 신음을 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아.. 박해영.. 너 괜찮냐."


해영을 감싼 팔을 푼 재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리고 해영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박해영. 괜찮냐고. 어?"
"네.. 그런데 형사님 팔이..."
"내 팔이 왜-."


해영의 말에 자신의 팔을 본 재한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긁힌거잖아. 너 진짜 괜찮은거냐?"


그냥 긁혔다고하기에는 재한의 팔은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다. 팔목에서 팔꿈치부분이 전부 아스팔트에 쓸려 살이 벗겨져있었다.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재한은 해영을 먼저 살폈다.


"전 괜찮습니다."
"경사진 곳에서 생각없이 무작정 뛰어오는 새끼가 어딨냐? 어? 사고났으면 어쩔뻔했냐고!"


화를 낸 재한은 짝다리를 짚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있었다.


"죄송합니다. 형사님이 그러고 가신게 마음에 걸려서 걱정이됐습니다."
"뭐, 내가 그러는게 한두번도 아니고 언제부터 신경썼다고 이 난리냐."


재한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서 발을 내딛는 찰나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형사님!"
"박해영. 나 부축 좀 해줘라. 다리에 힘이없네."


해영의 팔을잡고 일어난 재한은 담배를 입에 문채 해영을 응시했다. 꽤 긴 시간동안 그랬다. 해영은 재한이 그럴때마다 말없이 같이 바라보고는 했는데 재한의 눈에 비치는 슬픔 때문이었다.
재한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친 해영은 차로 향했다. 사건현장은 계철과 수현이 어느정도 마무리를 했을거라 생각했다. 지금 해영에게 중요한건 재한이었다. 재한을 조수석에 태운 해영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서로 돌아가는 길이 아님을 안 재한은 해영의 팔을 툭툭 쳐보였다.


"뭐하는거야. 차 돌려."
"병원으로 갈겁니다."
"이게 뭐라고 병원을 가. 우리가 그렇게 한가로운줄알아?"
"형사님 다리 다치신거 압니다. 그대로두면 아플거 아닙니까."


해영의 말에 재한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직업병이니 어쩌니 지껄여도 자신도 마찬가지이니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 가지고 괜히 싫은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재한은 눈을 감았다.
30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동네에 이름있는 큰 병원이었다. 해영은 재한이 진료를 받는동안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목격자는 알아봤어?"
"그게.. 이재한 형사님이 다치셨습니다. 지금 혜원병원에 와 있는데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뭐?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데?"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알았어. 끝나는대로 선배님이랑 같이 들어와."


수현의 목소리는 다소 무거웠다. 10여년이 넘도록 봐왔던 재한이었지만 그가 어디 다치기라도하면 수현은 항상 근심걱정가득한 부모처럼 슬퍼했다. 옥상에서 자신대신 칼에 찔렸을때에도 수현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었다. 지금은 냉정하기 그지없지만 그랬다.
시간이 꽤 지나고나서야 재한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팔에는 거즈를 치덕치덕 붙이고 볼에는 밴드가 붙어있었으며 오른쪽 다리에는 깁스를 한 상태였다. 누가보면 패싸움이라도 한것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해영은 재한을 못볼꼴을 본 사람처럼 쳐다보았고 재한은 인상을 쓰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너 내일부터 내 출퇴근 셔틀이다."
"몇주..."
"한달. 차수현한테 연락은."
"바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형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다고 내 다리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데... 앞으로 나는 신경쓰지말고 너나 잘 챙겨. 이러나 저러나 내가 뛰어든거고 니가 잘못한 건 없어."


툭툭뱉는 재한 특유의 말투에 해영은 '네.'하며 대답했다. 기죽어보이는 해영의 어깨에 팔을 걸친 재한은 병원을 나오면서 뭐가그리 좋은지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일도 있고 저런일도 있는거니까 이런거기지고 기죽지마라. 사람을 구하는 건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잖아. 빨리 들어가자. 차수현이 구박할라."
"이재한 형사님. 저는 형사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차에 탄 해영은 재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동도 걸지않은 채 둘은 말없이 서로만 바라보았다.


"너 그말 저번에도 했었지. 니 행복이나 찾아. 남걱정하지말고."
"형사님은 제 영웅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않고 사건을 해걸하려하고 저와 제 형도 도와주시고..."
"경찰이 안하면 누가하냐. 비리는 누가 파헤치고 강도는 누가잡고 어려운사람은 누가 도와주냐고. 누군가는 해야하는거다."
"그 누군가는 항상 이재한 형사님이었어요. 다른 누구도아닌 형사님이였다고요."
"그게 잘못된건 아니잖아. 가자 얼른."


재한은 낭떠러지 앞에 자라는 가녀린 나무같았다. 언제 떨어질지몰라 위태롭게 살아가는 그런 나무.
해영이 벨트를 매고 시동을걸자 재한이 한마디했다.


"나는 안매주냐."
"싫어하셨잖아요."
"야, 그래도 임마 내 팔이 이런데 이걸 어떻게 매."
"알겠습니다. 제가 친절하게 매드리죠."


해영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재한의 벨트를 매주었다. 재한은 왠지 해영을 앞으로도 계속 이런식으로 대할 것 같았다. 편한 후배사이가 됐으면 하는게 재한의 바람이었다. 그는 항상 소박했다.


"목격자 더 알아봐라. 분명히 누군가는 봤을거다."
"네."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했을때 해영은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 재한쪽으로 돌렸다. 재한은 아무말도 하지않았지만 해영은 재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았다.
재한과 해영은 대화를 할때면 오래하는편도 아니었기에 대화가 끊어지면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면 둘다 괜히 창문 밖을 본다던가 차 내부를 만지작거린다던가 그랬다. 그러면 대개 재한이 먼저 말을 꺼냈는데 오늘도 그랬다.


"박해영. 너 좋아하는 사람 있냐."
"아니요. 없습니다."
"생각 좀 하고 얘기해라 하고. 말 끝나자마자 대답하지말고."
"형사님은 있으십니까?"
"알아서 뭐하게."
"형사님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내서 뭘 하시려 물어보신거 아니잖아요."


재한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창에 기댔다. 해영과 대화를 하면 자기가 지는 기분이라던가 찝찝한 기분이 든다며 툴툴댄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화를 하는걸 보면 생각보다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있다. 좋아하는사람. 됐냐?"
"억지로 말하게 만든 거 같아서 별로네요."
"남한테서 다른사람 얘기 듣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내가 원래 내 얘기를 잘 안해. 그래서 차수현이 상처 받았던 적도 있고."
"형사님 여자한테 고백 받아본적 없죠?"
"멈춰."


재한의 말에 앞을 본 해영은 빨간불을 확인하고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재한이 회피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차형사님께 하시는 거 보면 여자를 대할 줄 모르시는 거 같아서요."
"걔가 여자냐? 형사지."
"형사이기전에 여자잖아요."
"둘이 그러면 좋냐?"
"질투하시지 마세요. 속좁아보여요."


해영의 거침없는 말에 재한은 '아아..'하며 앓는소리를 냈다. 해영은 말대답하기 선수였다. 수현에게는 하지않던 행동을 어째서 더 선배인 재한에게는 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못했다. 어떨때보면 콤비같기도했다.


"너 못하는 말이없다. 무전하면서 많이 편해졌나보지?"
"저 형사님 좋아합니다."
"뭐야, 뭔 고백이냐 그거?"
"좋아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저는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말도 안 걸어요."
"너 좋아하는사람 없다며. 나 좋아한다는 건 뭐냐?"
"그건 의미가 다르잖아요."


해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재한을 쳐다보았다. 해영은 재한이 장난스러울때면 항상 웃으며 맞장구를 잘 쳐주었는데 그럴때마다 수현은 둘이 이상한 조합의 콤비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했다.
재한은 이제 담배에 대해 해영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같은 의미면 안 되는거냐."
"네?"


재한의 말에 말문이 막힌 해영은 서로 들어와 주차를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재한을 쳐다보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시동은 여전히 걸려있었다. 해영은 이내 입을 열었지만 재한이 먼저 치고들어왔다.


"넌 농담도 몰라?"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재한은 해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해영은 재한과 달리 웃을 수 없었다.


"박해영. 정신 나갔어?"
"괜찮습니다."


해영은 덤덤하게 말한후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갔다. 재한은 그런 해영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싱태를 살폈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누가봐도 분명했다. 재한의 안전벨트를 푼 해영은 재한을 부축한채 차문을 닫았다. 그는 서에 들어갈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재한과 해영이 들어오지 계철이 놀란 표정으로 수현을 불렀다.


"차형사!"
"선배 소리 안질러도 다 들ㄹ..."


수현은 그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덕분에 재한과 해영은 자리에 앉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비켜. 앉게."


재한은 수현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다행히 수현은 다시 몸을 움직였지만 놀란게 아직 진정되지않았다.


"박해영. 어떻게 된거야?"
"저를.."
"골목에서 나오다가 차를 못봐서 치였다."


자리에 앉은 재한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해영은 수현을 차마 보지못한 채 자리로 가 앉았다. 해영은 재한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말하지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않았다. 재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재한은 항상 그랬다. 하지만 해영을 배려했다기보다는 쓸데없이 길게 끄는게 싫을 뿐이었다.


"선배님. 입원은 안해도 된대요?"
"다리만 다친거라서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말고 일해."
"차형사님. 동일범의 소행이 맞았습니까?"


해영은 가만히 있다가 사건이야기를 꺼냈다. 재한의 일은 뒷전이었다. 이 사건이 다 끝난 후에 물어도 늦지않았다.


"피해자의 가슴에 남긴 상처와 매듭이 11년전과 같아. 동일범이야. 그당시 사건현장의 사진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어."
"11년만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뭘까요."
"그 사이에 감옥에 갔다왔을수도 있어. 그러면 공백이 생기게되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범인은 출소를 한 후에 바로 범행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보이지않아요. 그러니까 최근 출소자를 찾아봐도 소용없어요. 3명의 피해자 모두 우발적으로 죽인 흔적도 없었어요. 범인은 계획적이고 꼼꼼한 사람이에요. 적어도 하루이상은 피해자를 지켜뵜을거에요."


해영은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재한은 여전히 해영의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채였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캐치해내지 못할 수현이 아니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치고 너랑 선배님은 왜 그렇게 냉랭한거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기엔 너무 이상하잖아 둘이. 사건에 피해가는 일 없도록 해. 선배님. 듣고 있어요?"
"네에! 알겠습니다-! 차수현 형사님!"


재한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는 길이 좁아 의자를 툭툭치니 해영이 일어나 재한을 따라나섰다.


"아니, 비키라는 거였는데. 안 따라와도 된다. 부축해주지 않아도되고. 그러니까 니 할일 해."


차가운 재한의 말투에 해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래도 재한에게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지못했다. 알았다면 지금처럼 어벙한 상태는 아니었을테니.
재한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계단에 걸터앉았다. 구부러지지않은 발목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하나남은 담배를 입에물고 고개를 숙였다. 재한은 해영에게 하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해영의 잘못이라고는 재한의 옆에 있는 것 뿐이었다. 그게 정말로 잘못인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랬다. 재한은 애꿎은 담배필터만 이로 잘근대며 생각에 잠겼다.


"박해영. 계철선배랑 둘이 목격자 알아봐."
"만약 11년전과 같은 패턴이라면 범인은 분명 10일후에 다시 나타날겁니다."
"그 전에 잡아야지. 범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면 분명 재한과 마주칠테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일단 서 입구까지는 재한이 보이지 않았다. 딱히 피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마주친다면 무어라 말을해야할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재한이라면 말없이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해영의 마음은 이러나저러나 무겁기만했다. 차에 타자 마음이 놓인 해영은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박해영."


어디서 나타났는지 창문에 몸을 밀착한 재한은 살짝 열어놓은 창문틈사이로 지폐를 끼어넣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을 본 해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올때 초콜릿 좀 사와라. 당떨어진다."
"돈은 안주셔도 되는데."


해영은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괜스레 초췌해보이는 재한을 더이상 바라볼수가 없었다. 미안하기도 했고.
다시 혜원동으로 향한 해영은 신호를 기다릴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재한은 아무렇지않을지몰라도 해영은 재한에게서 그 농담에 대한 답을 들어야만했다. 농담이라하더라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야했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해영은 계철과 함께 목격자를 수소문했다. 편의점 근방의 골목길에 일을하는 사람들과 연락처를 아는 몇몇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자신이 무얼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해영은 머리를 짚으며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느곳과 다르게 싸늘했다.

의자에 몸을 맡긴채 인터넷을 하던 재한은 수현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님 다리다쳤다고 그렇게 놀거에요?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나 노는거 아니다. 혜원동 사건현장에서 찍힌 사진 보고있는데, 수상한 사람 없나하고."
"밖에도 못나가고 뭐 할거에요? 저희 서포터 해주실거에요?"


비꼬는듯한 수현의 말투에 재한은 씹던 껌을 휴지통에 뱉고 턱을 매만졌다. 답답한건 재한 본인이었지만 서에서 그런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병신같이 다치냐는 말을 들었으면 들었지 칭찬은 감개무량이었다.


"저번에 내가 했던말 기억하냐. 경찰은 흔들리면 안된다고 했던거."
"네. 기억하죠. 저한테 시계 주셨을 때잖아요."
"그래. 니가 닭똥같은 눈물 흘렸을때지. 이제 나 안좋아하냐?"
"네."


재한의 책상에 널브러져있는 서류철을 정리하며 간결하게 대답한 수현은 재한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냐는 듯했다. 재한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대답이 빠르잖아."
"시간을 끌어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그렇다고 그러라는 건 아니고-. 차수현. 현장 사진 좀 줘봐라 거기 있는거."


사진을 건낸 수현은 비어있는 해영의 자리에 앉아 재한을 쳐다보았다. 다소 부담스러울법도한데 재한은 사진에 집중만 할 뿐이었다.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은."
"피해자의 신원확인이 안된상태에요. 가방에 지갑도 소지품도 없었어요. 11년전과는 조금 달라요."
"범인이 돈이 궁해졌나보지. 뭐 그런 일이 한두번 일어나냐."
"그렇죠. 그런데 선배님 방금전에 왜 옛날 얘기를 꺼내신거에요?"
"때가 되서."
"때요?"


어리둥절한 수현과는 달리 재한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다른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대체 무슨 때를 말하는건지 수현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대답을 해 줄 재한도 아니었지만.저녁이되서야 서로 돌아온 해영은 재한의 비어있는 자리를 보고는 가만히 서있었다. 다리다친사람이 대체 어딜 이렇게 돌아다니는건지, 정말 다쳤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재한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은 해영은 피해자에 대한 서류를 훑었다.


"누군지 나왔냐. 내 초콜릿은."


이순간만큼은 피해자보다 초콜릿이 더 중요한 것처럼 재한은 해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었지만 그랬다. 작은 검은봉지에 가득 담긴 초콜릿은 며칠을 두고먹어도 될 만큼 많은 양이었다. 해영은 재한의 자리에 툭 놓고는 다시 제 할일을 하기 바빴다.


"너 내가 준 돈보다 초과했다고 달라고하면 안된다. 어?"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형사님 다 드세요."
"어차피 만원 밖에 없었어."


재한은 굳이 자신의 빈지갑을 해영에게 보여주었다. 돈이 더 있다해도 해영이 달라고 하지는 않을텐데 참 짖궂었다. 해영은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담배피러 갈건데 같이 가자."


재한은 그새 적응했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잘만 걸었다. 걱정하는 해영과는 달리 아무 근심이 없어보였다.
계단에 앉은 재한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늘 해영이 본것만해도 6개였는데 아마 2배 이상은 더 피웠겠지. 옆에 걸터앉은 해영은 궁금증을 참지못하고 재한에게 물었다. 사건이 끝날때까지는 기다릴 수 없었다.


"형사님. 왜 거짓말 하신겁니까?"
"그거 물어보려고 밖에까지 나온거야? 이러나 저러나 다친건 마찬가진데 이유가 뭐가 중요하냐. 그렇게 찜찜하면 다시는 이러지 마라."
"... 아까 그 농담도 해명해주세요."
"농담은 그냥 농담이야. 해명같은 건 없어."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겁니다. 말씀해주세요."


재한은 저 눈빛을 알고있었다. 해영이 어렸을 적 형인 박선우가 누명을 썼을 때 보았던 눈빛이었다. 재한은 그 날을 잊을 수 없었다. 저 눈빛을 볼때면 그날의 일들이 항상 다시 생각났다."차에서 얘기하자."재한은 긴밀히 중요한 할 말이 있는지 차로 해영을 끌고갔다. 물론 해영이 제 발로 걸어가긴했지만 그랬다. 차에 탄 재한은 창문 틈으로 재를 떨구었다.


"내가 한가지 고질병이 있어. 좋아하는 여자한테 아무것도 못한다는건데 넌 남자라서 내가 너무 서슴없었나보다. 그래서 그런 말한거고 그건 내 실수였다."
"네..."


해영은 시무룩해졌다. 재한이 생각과는 다르게 이유를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질문을 해도 막힘없을 재한이었지만 해영은 막상 그 상황에 마주하니 그가 밉기만했다.


"저 형사님 좋아한다고했던거 거짓말 아닙니다."
"그래봤자 사랑도 아닌데 무슨 변명을 하냐 너는."
"맞아요 그거."
"아까 머리를 어디에 박은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박해영 너 그런사람 아니잖아."
"제가 어떤사람인지 형사님은 모르잖아요."
"모르지. 모르는데, 니가 그런 말 섣불리 하는 사람이 아닌건 안다."


재한은 담배를 창문밖으로 던졌다. 의외로 재한은 해영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알고있었다는듯이, 혹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는듯이 그랬다.


"너 그거 아냐. 같은 근무지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굉장히 곤란한거. 특히나 우리같은 경찰들은."
"압니다."
"잘 아는 놈이 왜그래. 나랑 피해자 둘중에 한명만 구해야한다면 당연히 피해자를 구해야되는거야. 경찰은 그래야돼. 그런데 너는 그게 안되잖아."
"형사님도 저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형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판단력이 흐려지는건.."
"난 어차피 이번사건이 끝나면 그만둘거다."


재한의 말에 해영은 좁은 차에서 화들짝 놀랐다. 여느때와 다름없던 재한이 대뜸 형사를 그만둔다니..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단 한번도 재한의 부재를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재한이라면 퇴직할 나이가 될때까지 경찰을 할 것 같았지만 그건 해영의 생각일 뿐이었다. 재한도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꺼낸 말이었다. 어쩌다보니 해영이 처음일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만두시는겁니까?"
"한번쯤은 여유로워지고싶거든. 경찰이되고나서 단 하루도 마음놓고 자본적이 없다. 사건생각밖에 안나서 몸도 상하고, 무엇보다 아버지께 너무 소홀했어 나는."


한숨을 훅 쉰 재한은 더이상 아무말도하지 않았다. 해영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이유는 단순히 같은 팀이기때문이 아니었다. 마음 때문이었다. 햇수로 따지자면 20년도 넘게 알아온 사람에게 마음이 가지않을리 없었다. 비록 만난건 얼마되지않았지만 재한은 항상 해영을 마음에 두고있었다. 정이란 무서운것이었다. 몇년간의 무전뿐이었더라도 정이라면 정이었다.


"형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수없죠. 남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차형사님께는 언제 말씀하실겁니까?"
"조만간 말 할거다. 박해영. 나 좀 봐-."
"네..-?"


고개를 돌리니 재한이 해영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해영의 입에 까슬한 재한의 수염이 맞닿았다. 차가 구석진곳에 주차되어 다행히 아무도 둘을 보지 못했다. 몸이 경직된 해영은 재한이 입을 떼고나서야 어깨를 내렸다.


"담배냄새 괜찮지-."
"ㄴ..네.."


잔뜩 긴장한 해영은 말을 더듬으며 표정을 풀었다. 미간에 인상이 쓰여지지않은 해영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재한은 해영의 대답을 듣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진한 담배냄새가 입안에서 퍼지자 해영은 입을 벌렸고 그 틈사이로 재한의 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해영의 머릿속은 복잡하다못해 백지였다. 갑작스레 적극적인 재한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정신을 차린 해영은 한동안 아무말도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해영과 달리 재한은 카 시트를 뒤로 젖히며 목을 가다듬었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사건으로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나도 할 일 많은데 계속 농땡이나 까고있네."
"아닙니다."
"나 그만두면 백수인데 괜찮냐?"
"네? 뭐가 말입니까."
"백수랑 만날거냐고."


해영의 입가는 미세하게 씰룩였다. 이걸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연애같은 건 해 본적도 없는데다가 그 대상이 남자에 스무살 넘게 차이나는 아저씨라니..

"생각해본적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뭐.. 천천히 생각해봐. 어디 안가니까."


해영의 시나리오에는 '재한이 승낙한다.'는 없었던게 아니었을까. 어안이벙벙한 해영을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 사고가 멈춘듯했다. 표정에서 모든게 보여졌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차키 줘. 조금이따 들어갈게."


재한에게 키를 건낸 해영은 고개를 숙인채 부리나케 서로 들어갔다. 그런 해영이 귀엽기라도한지 재한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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